The Unafraids

Saturday, November 27, 2021

최근 NYTimes 에 실린 Opinion Column 글 하나가 나의 이야기와 참 비슷했다. 가난한 환경에서 자란 내가 그렇지 않은 나의 [중산층] 아이들을 어떻게 길러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담긴 글이었다.

저자는 가난하게 자라온 자신이 어렸을 때 경험해 보지 못한 많은 경험들 (Birthday Presents, Travel Overseas) 을 경험하고 있는 아이들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고, 또 자녀들 또한 그렇지 못했던 자신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I don’t know what it’s like to spend so much time unafraid.

나는 나의 아이들이 아무것도 두렵지 않은채 자라는 것이 전체적으로는 좋다. 그렇지만 내가 자라온 환경에서만 경험할 수 있었던 그 무엇인가가 이 아이들에게 전해지기 힘들다는 것에 대한 체념같은 것이 있다.

나보다 더 큰 존재가 있다는 것. 그 분이 나를 붙잡고 계시다는 것. <나>라는 사람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 두려워해야 할 바운더리와 존재가 있다는 것. 아름다운 삶은 혼자 달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

Suffering 과 Struggle 없이 이런 가치들이 그들에게 Imprint 될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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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

Saturday, November 20, 2021

요나서를 여러번 읽었다. 마음이 뜨겁고. 지나가지 못하고 있다. 요나의 이야기가 어디까지 사실인지 알수 없지만, 입체적이고 트렌디하다.

도망치는 사람이지만 포기가 쉽고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삶의 바닥에서 은혜를 체험한 사람이지만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며) 그의 삶은 쉽게 바뀌지 않았다. 자신이 구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지만 마음 속으로는 그들을 좋아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구원을 몸으로 경험했지만 하나님의 구원을 다시 보고 싶어하지 않았다.

이야기의 전개를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실망스로운 이야기이겠다. 그렇지만 요나서는 나에게 커다란 거울 같은 말씀이다. 요나의 모습들은 바로 지금 나의 모습들이다.

성경은 이런 요나가 어떻게 변해가는지에 집중하고 있지도 않다. 하나님은 이런 요나를 통해서라도 구원의 의지를 이루시고 계시다 정도로 끝난다. 이 부분 또한 내가 요나서를 며칠째 계속 지나가지 못하고 있는 이유이다. 주님의 의지 이루소서. 나의 됨됨이를 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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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드백 주는 관계

Monday, October 25, 2021

회사에서는 서로 피드백을 주면서 일한다. 힘들어 보이는 일이지만 어떤 곳에서는 1년에 한번, 자주는 3개월에 한번 하는 곳도 있었다. 동료가 서로 피드백을 주기도 하고, 매니저도 팀원을, 팀원 전체도 한명씩 매니저에게 피드백을 준다.

사람들은 그러면서 자란다. 뭐 이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가 경쟁을 부추기는가 하는 생각들도 여기저기 있겠지만, 좋은 의도로 잘 쓰여지면 피드백을 서로에게 줄수 있는 구조는 사람을 결국 자라게 만든다고 본다.

피드백 주고 받는 문화도 잘 형성이 된 곳에서는, 그것을 남용하기 보다는 더 소중히 여기고 잘쓰는 모습도 본다. 아무말이나 하지 않고, 평소에 같이 일하면서 느꼈던 부분들 잘 생각해서 그 사람에게 도움을 줄수 있는 말로 잘 정리도 하고 진심도 담아본다.

긴장되지만 분명히 사람을 자라게 하는 요소가 있다. 자라는 것을 본다.

이런 것은 회사에서만, 그러니까 돈을 벌어야 하니 어쩔수 없이 해야하는 구조에서만 가능한 걸까?

교회 같은 곳에서는 이런 것이 불가능한 것일까? 피드백은 교회같이 쉼과 안정이 중요한 곳에서는 너무 날카로운 물질인가. 자라고 싶어하는 사람들도 있을텐데 …

회사에서 사람들이 자라는 것을 보면서 가끔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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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라는 것을 보는 기쁨

Friday, October 22, 2021

몇년전 엔지니어를 하다가 매니저로 커리어를 바꾸기로 결정했을때 나에게 있어 가장 큰 목적은 나 혼자 이룰수 없는 일을 해 보고 싶다는 생각에서였다.

How do I create an influence that is bigger than myself?

뭐 겉으로 보면 그렇게 틀리지만은 않은 목적이겠지만... 1,2년이 지났을 때 정도였나, 그런 목적에 한계가 있음을 알게되었다. 나로 시작해서 나로 끝나는 목적의식이기 때문이다.

시간이 조금 지나니 매니저에게 가장 큰 보람은 자기 자신의 성취가 아니라, 같이 일하는 직원들이 자라는 것을 보는 기쁨이라는 것을 늦게나마 깨달은 것이다.

사람이 바뀌지 않을 것 같지 않지만, 계속해서 물을 주고 코칭을 해주면 점점 자라고 바뀌기도 한다. 많이 도와주어야 하는 경우도 있지만, 물과 공기만 공급해주어도 스스로 자라는 사람들이 있다. 2년 정도 지나고 나는 나에게 가장 큰 기쁨은 사람들이 자라는 것을 보는 것이되었다.

My biggest reward is to see people grow.

사람이 자라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정말 큰 기쁨이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노력하는 것은 사랑에 가까운 것이다. 피드백과 충고도 주고, 격려도 해주고, 잘했을때 팀과 함께 Celebrate 하고, 한계를 극복할 수 있도록 적절한 질문도 미리 노트에 적어놓았다가 1-on-1 때 나누기도 한다.

사랑이라고 말하면 너무 거창하지만 사랑에 가깝다. 매니지먼트의 보람이다.

Less Conformity

Monday, October 04, 2021

지금 내가 다니는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배우는데 많은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그 하늘의 모습이 땅에 나타나는 것을 Core Value 로 삼을 만큼 그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편이다. 교회가 처음 시작되었을 때에도 지금도 그런 가치들이 중심에 있다.

처음에는 그렇게 살아가는 과정이 공동체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행동하는 Common Culture 도 만들어가고, 섬기는 이웃도 같이 찾아가고, 또한 우리는 이 세대에서 무엇을 저항하는 가에 대해서도 공통 분모를 찾아가려고 했다.

지금 돌아보면, 내가 공동체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던 부분이 꼭 그렇게 되어야 했었던 것은 아니구나 라는 생각에 겸손해 진다. 생각도 많이 다르고, 자라온 방식도 다르기 때문에, 다 비슷한 생각을 할수는 없는 것이다. 이것은 누가 흠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냥 심플하게 다르다는 것인데, 받아들이면 되는 부분 같다.

공동체성 자체가 신앙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될것 같다는 생각도 한다. 신앙의 목적지는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는 것을 배우는 것인데, 다양한 방법으로 여러 스펙트럼으로 갈수 있다고 본다.

그래서 나는 공동체가 무언가를 같이해야 하는 Conformity 에 시간을 많이 보내는 것이 오히려 신앙에 해가 될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다른 생각들을 모으고 통일하는데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다르지만 일단 하나님의 나라를 살아보고 개인적인 삶에서 노력하고 고민하는 것이 더 우선인 것 같다.

그렇게 개인이 충분히 건강하게 하나님 나라를 살아볼 때, 과정/실패/결과물 들이 모여져서 함께 얘기라도 꺼낼 수 있는 상태에 가는 것이다. 이 결과물들을 함께 얘기하는 시간이 오히려 더 값지다. 이런 살아보는 시간 없이 아무것도 할수 없다. 그렇게 값진 시간이 Conformity 를 향해 쓰여지면 되려 아까운 것 같다.

통일되는 것에 마음을 쏟기 보다는, 다양한 모습으로 하나님이 누구신지 계속 알아가고 이렇게 다른 사람들도 다 품으실 수 있는 크심과 그 신비 안에 같이 들어가야 할 것 같다. 또 그렇게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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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undaries

Friday, October 01, 2021

흔히 접할 수 있는

신앙인으로서 어떠 어떠한 삶의 방식을 취해도 되는가

라는 질문이 늘 편하진 않다. 이런 질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많은 경우 ‘내가 세상에서 누리고 싶은 것이 이렇게 많은데 이 부분도 괜찮은가’ 라고 확인하고자 하는 Minimum Condition 에 대한 질문이기 때문이다.

최소한의 Boundary 를 지키고자 하는 노력은 아예 그것이 없는 것 보다 좋은 거야 라는 생각도 든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은 그런 최소한의 조건을 바라보면서 자라지 않을 것 같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기독교인으로서 집을 한채 이상 사서 투자해도 되는가’ 에 대해서 고민한다고 상상을 하자. 성경적으로 소유에 대한 정의, 그리고 수고와 저축의 의미 뭐 이런 것을 찾아보면서 접점을 찾아 볼수 있겠다. 하지만 이것은 분명 어디까지 허용되는가에 대한 Boundary 질문이다.

Boundary 에 시선이 집중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떻게 하면 내 평생에 이웃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될것인가, 혹은 정말 내가 궁극적으로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최고의 표현이 무엇일까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집 2채 구매’ 에 대한 질문을 꺼내기 조차 힘들것 이다 (특히 Housing Supply 가 이렇게 없는 시점에서). 그들의 관심은 Maximum 에 대한, 신앙의 목적지가 어디에 있을까에 대한 질문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앙인으로서의 삶은 Boundary 에 초점을 맞추기에 너무 고귀하다. 죽음이 두렵지 않은 삶, 더이상 내가 노예로 살지 않는 삶에서 어떤 생활 양식이 나올까에 대한 커다란 상상들이 대신 나와야 할텐데 말이다. 우리는 어디까지 갈수 있는가!

한마디 느낌

Thursday, February 18, 2021

회사에서 디자이너를 구하려고 인터뷰를 몇명 했다. 프로그래머들만 주로 인터뷰를 했는데, 디자인 감각 있는 사람들과 대화 나누는 것은 정말 즐거운 일이었다. 만난 사람 중에 정말 마음에 드는 사람이 한명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인터뷰에서는 Assertive 하기 쉬운데, 이 사람은 참 겸손했고, 자기 생각보다는 다른 사람의 관점을 통해 문제를 파악하려는 노력이 보였다.

인터뷰 중에 지나가는 말로 이런 말도 했다.

I use my ignorance as a tool.

사람이 어떻게 이런 멋있는 말을 힘빼고 할수 있을까. 며칠이 지났는데도 이 사람의 말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자기가 모든 것을 알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하지만 '알지 못함'이 다른 사람에게 새로운 관점을 열어줄 수 있는 기회를 만든다는 것을 보여주고, 또 본인이 답을 모르지만 그것을 통해서 일해 보겠다는 의지를 보여준 짧은 말이었다.

내가 너무 과장해서 해석한 것일수도 있다. 그렇지만, 나는 이런 사람들을 볼때마다, 멋있는 작품을 본것 같은 느낌에 며칠씩 마음이 여운이 남는다. 어떻게 삶을 살아서 이런 깊음과 겸손한 인격에 도달했을까.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흘러나온 말이 다른 이에게 이런 여운을 남길 수 있는 사람일까. 너무 부러웠다.